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지음 / 박병규 옮김 - 민음사



책소개 

파블로 네루다의 꿈과 사랑을 그린 자서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태어날 때부터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의 삶을 기술한 회고록이다. 낭만적인 연애 시인에서 위대한 민중 시인으로 거듭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 중에서도 자신이 특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 사건, 사랑, 그리고 창작과 비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네루다는 젊은 시절 연애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낭만적인 보헤미안 청년에서 민중시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세 번의 결혼, 외교관 생활과 여행, 도피와 정치 망명을 겪어야 했다. 이 책에서는 네루다라는 한 시인의 걸어온 인생을 전해주고 있지만,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그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과 인물을 회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평온한 유년기로부터 시작하여 보헤미안 생활을 하던 청년 시절과 동남아시아에서 보낸 영사 시절을 거쳐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이념적 갈등, 칠레의 1970년대 정치 상황 등을 그리고 있다. 또한 군데군데 시의 창작과 비평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가르시아 로르카, 피카소, 에렌부르크, 네루, 엘뤼아르, 카르트로, 체 게바라, 아옌데 등 여러 인물들에 대한 단상을 풍부한 에피소드와 함께 들려준다.  

저자소개

저자 : 파블로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스무 편의 사랑과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인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 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위의 첫 시집 외에 『지상의 거처ⅠㆍⅡㆍⅢ』 , 『모두의 노래』,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 『이슬라 네그라 비망록』, 『에스트라바라기오』, 『충만한 힘』 등이 있다.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1 시골 소년
칠레의 숲 / 유년기와 시 / 비의 예술 / 처녀작 / 미망인 셋이 사는 집 / 밀짚 속에서 나눈 사랑

2 도시의 방랑자
자취집 / 수줍음 / 학생연맹 / 알베르토 로하스 히메네스 / 겨울의 기인들 / 큰 사업 / 초기 시집 / 말

3 세계의 길
발파라이소의 방랑자 / 구멍에 파견된 칠레 영사 / 몽파르나스 / 동양 여행 / 알바로

4 빛나는 고독
밀림의 이미지 / 인도 국민회의 / 와불 / 불행한 인간 가족 / 홀아비의 탱고 / 아편 / 실론 / 콜롬보 생활 / 싱가포르 / 바타비아

5 가슴속의 스페인
가르시아 로르카 / 미겔 에르난데스 / 잡지 《초록 말》 / 그라나다의 범죄 / 스페인을 다룬 책 / 전쟁과 파리 / 낸시 큐나드 / 반파시즘 작가 대회 / 가면과 전쟁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한 길을 선택했다 / 라파엘 알베르티 / 칠레의 나치 / 이슬라네그라 / 스페인 사람들을 데려오시오 / 사악한 인물 / 장군과 시인 / 위니펙 호 / 긴 여행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멕시코 화가들 / 과테말라의 나폴레옹, 우비코 / 권총 선집 / 왜 네루다인가 / 진주만 공격의 전야 / 연체동물학자 / 잡지 《아라우카니아》/ 마술과 신비

8 암담한 조국
마추픽추 / 초석 산지 / 곤살레스 비델라 / 「찢겨진 육신」/ 원시림의 길 / 안데스 산맥 / 산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 / 파리 여행과 여권 / 뿌리

9 망명의 시작과 끝
소련 방문 / 다시 찾은 인도 / 첫 중국 방문 / 『대장의 노래』/ 망명의 끝 / 어설픈 해양학

10 여행과 귀환
우리 집 양 / 1952년 8월부터 1957년 4월까지 /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투옥되다 / 시와 경찰 / 다시 찾은 실론 / 두 번째 중국 방문 / 수후미의 원숭이 / 아르메니아 / 포도주와 전쟁 / 민중이 되찾은 궁전들 / 우주 비행사들의 시대

11 시는 직업이다
시의 힘 / 시 / 언어와 함께 살기 / 비평가도 고통을 당해 보라 / 단시와 장시 / 독창성 / 병 속의 범선과 선수상 / 책과 조개껍데기 / 깨진 유리창 / 아내 마틸데 우르티아 / 별을 발명하는 사람 / 거장 엘뤼아르 / 피에르 르베르디 / 예지 보레츠사 / 솜이오 되르디 / 살바토레 콰지모도 / 바예호는 살아 있다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비센테 우이도브로 / 문단의 적 / 비평과 자평 / 또 한 해가 시작된다 / 노벨 문학상 / 칠레 치코 / 9월의 깃발 /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치스 / 비토리오 코도빌라 / 스탈린 / 순박함의 교훈 / 피델 카스트로 / 쿠바인들의 편지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극단주의와 스파이 / 공산주의자들 / 시와 정치 / 대통령 후보 / 아옌데 선거 운동 / 파리 주재 대사관 / 귀국 / 에두아르도 프레이 / 라도미로 토미크 /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연보
옮긴이의 글

출판사 서평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의 꿈과 사랑

사람에게 어떤 딱지도 붙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파블로 네루다
네루다의 시는 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생동이다. ―정현종

“은밀하게 타오르는 저 불길에 타 죽고 싶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우물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불이든 물이든 간에 나 자신을 그녀에게 던질 용기는 없었다.” 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솜브레로 모자를 쓰고 칠레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낭만적인 시인 네루다. 젊은 시인은 지독한 수줍음에 시달렸지만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그 시절 산티아고의 로맨스를 담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사랑에 빠진 전 세계 연인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과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죽음은 네루다의 시를 바꾸었다. “성숙한 작가는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다.” 어려운 미학적 향연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네루다가 도달한 곳은 바로 민중이다. 네루다는 “미래의 기쁨, 내일의 평화,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노래하고 투쟁했다.” 체 게바라는 밤마다 동료 게릴라들에게 네루다의 시를 읽어 주었다.

시인, 외교관, 망명자, 공산주의자, 평화주의자로서 그의 양심은 평안했고 그의 지성은 불안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네루다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시인

고통 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8장 암담한 조국)

1904년 7월 12일 칠레 출생. 아버지는 기찻길을 사랑하는 철도원이었고, 어머니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일찍 여의었다. 열 살 때부터 시인을 꿈꾸며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가명으로 시를 발표했고(1920년부터 썼던 필명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가 결국 정식 이름이 된다.) 한동네 살았던 시인 가브리엘 미스트랄의 서재에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 탐독했다. 젊은 날 지독한 수줍음에 시달렸지만 연애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낭만적인 보헤미안 청년에서 민중시인으로 거듭나기까지 세 번의 결혼, 빈궁한 외교관 생활과 여행, 도피와 정치 망명을 겪어야 했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는 이 파란만장한 삶 중에서도 특히 시인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 사건, 사랑 그리고 창작과 비평에 관한 견해를 담았다. 또 이와 더불어 가르시아 로르카, 피카소, 에렌부르크, 네루, 엘뤼아르, 카스트로, 체 게바라, 아옌데 등 여러 인물들에 대한 단상을 풍부한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내고 있다.

열여덟 살에 사범대학교 진학을 위해(불문학 전공) 산티아고로 상경한 네루다는 아버지의 철도원 망토를 두르고 매일 두 편 이상의 시를 쓰면서 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네루다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4년 시적 웅대함을 포기하고 소박한 표현과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추구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다. 이 시절, 네루다가 기억하는 친구들 중에는 항상 소를 끌고 다니며 동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농부 시인, 프로레슬링 선수에게 도전했다가 비참하게 당하고 나서 시집 헌사에 “나를 죽이라고 고함쳤던 4만 명의 개자식들에게”라고 쓴 엉뚱한 철학자, 해표 가죽으로 큰돈을 벌겠다며 네루다를 사업에 끌어들인 가짜 시인 들이 있다.

1927년 한 부자 친구가 네루다를 예술의 나라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며 외교관으로 추천했지만, 네루다의 첫 발령지는 듣도 보도 못한 랑군(지금의 미얀마)이었다. 영사가 된 것을 축하하러 모인 친구들 앞에서 네루다는 조금 전에 들은 자신의 부임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외교관이 된 네루다는 아시아에서 귀족들과 외교관 사회에 신물을 느끼고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갔다. 1935년 이때 느낀 고독을 담은 『지상의 거처』는 또 한 번 시인의 저력을 보이는 수작이다.

육감적인 연애 시인에서 위대한 민중 시인으로 거듭나다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르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4장 빛나는 고독)

1936년 7월 19일 밤, 네루다의 친구 로르카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네루다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바치는 송시」를 썼고, 이 시에서 로르카의 병원을 파랗게 칠한 데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청색이 제일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색은 하늘처럼 자유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로르카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어떤 자리든 얼굴만 내밀어도 분위기가 살아났습니다.” 네루다의 청색에는 그런 가르시아 로르카의 마술적인 힘이 담겨 있다. 네루다는 공화군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스페인주재 칠레 영사 직에서 잘렸다. 로르카의 죽음은 긴 내전 기간 네루다가 겪은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고, 내전 중에 어렵게 인쇄한 시집 『가슴속의 스페인』은 이제 몇 권 안 남았는데, 그중 한 권이 워싱턴 국회도서관의 20세기 희귀본 진열장에 놓여 있다. 네루다에게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스페인 내전 이후의 네루다는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더 이상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 나중에 칠레 정권이 진보적인 인민전선 정부로 바뀐 후에 새롭게 이민국 관리 담당 영사가 된 네루다는 공무원들의 온갖 훼방을 물리치고 스페인 내전의 희생자들을 칠레로 망명시켜 주는 역사적인 일을 해낸다.

네루다는 특히 스페인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를 위대한 장인, 진정한 시인으로 여긴다. 알베르티는 “위기의 순간에 시는 유용한 공공재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이 점에서 마야코프스키와 유사하다. 유용한 공공재로서 시는 힘, 기쁨, 진정한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갖지 못한 시는 소리야 나겠지만 노래하지는 못한다. 알베르티 시는 항상 노래한다.” 네루다는 이제 휴머니즘으로 돌아선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이제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쓰기 시작한다.

지성사에서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한 사건도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흘린 피는 한 시대의 시를 요동치게 만든 자기장 같았다. (5장 가슴속의 스페인)

1943년 스무 살 연상의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하는데, 그녀는 네루다의 정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탈리아 소설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처럼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이 1945년 3월 네루다를 상원의원으로 선출했고, 네루다는 7월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칠레 노동자들은 달나라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른 바위산에서 하얀 비료(초석)와 붉은 광물(구리)을 캐며 열악한 생활을 했다. 항상 더러운 물과 기름이 고여 있는 작업장 바닥에 고작 널빤지 하나 깔기 위해 노동자들은 8년 동안 열다섯 번 파업하고 일곱 명이 죽어 나가야 할 정도로 칠레의 노동 환경은 비참했다. 네루다는 칠레의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부터 표를 받았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들의 궁벽한 삶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네루다는 노동자의 편에 서기 위해 공산주의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네루다에게 공산주의는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집회 때마다 청중은 네루다에게 시 낭송을 요청했고 그들이 네루다의 시를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간에 그들의 경청하는 자세만은 참으로 진지했다.

광부들의 얼굴은 사막을 닮았다. 피부는 햇볕에 검게 그을렸고, 검고 강렬한 눈동자에는 고독과 소외감이 서려 있었다. 사막에서 산악 지대로 올라가고, 가난한 집을 방문하고, 등골이 휘어지게 일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궁벽한 사람들의 희원을 안다고 해서 내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시는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시 덕분에 고단한 삶을 사는 동포들과 한데 어울릴 수 있었고, 그들은 나를 둘도 없는 형제처럼 받아 주었다. (8장 암담한 조국)

네루다가 지원했던 비델라 대통령이 본색을 드러내고 독재자로 변절하자, 네루다는 도피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평화의 시인이 살아갔던 세상은 너무나 위험천만했다. 과테말라에서는 나폴레옹을 꿈꾸던 독재자 우비코의 경찰총장이 겨누는 총구 앞에서 시 낭독회를 감행했다.

내 시와 경찰 사이의 거듭되는 대결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했듯이 내가 경험한 황당한 일이나 이제는 얘기조차 못 하게 된 사람들이 겪은 수많은 고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이 도사리고 있다. 이 폭탄이 터지면 지구상에는 살아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내 희망을 꺾지는 못한다. 이 위기의 순간에도, 이 전멸의 위협 속에서도 사태를 직시하면 서광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 그 어떤 시련도 이런 희망을 꺾을 수 없다. (10장 여행과 귀환)

“민중시인… 이것이 내가 받은 진짜 상이다.” ―파블로 네루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4장 빛나는 고독)

도피와 망명 생활은 힘들었지만 이때 위대한 서사시 『모두의 노래』(1950)를 탈고한다. 1952년 칠레로 돌아와 마틸데 우루티아와 세 번째로 결혼하고, 다음해 레닌 평화상(스탈린 평화상)을 받는다. 네루다는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에게 문학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었다. 네루다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은 따로 있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노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8장 암담한 조국)

네루다는 결국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네루다가 이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한 때는 197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 난 후다. 결국 다음 해, 네루다가 지지했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로 무너지고 10여 일 후인 9월 23일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네루다가 거처했던 ‘이슬라네그라’, 산티아고의 ‘차스코나’, 발파라이소의 ‘세바스티아나’는 네그라가 수집한 독특한 선수상(船首像)과 조개껍데기들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1963년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라디오에서는 내 이름이 스톡홀름에서 오르내리고 있으며, 가장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라고 떠들어 댔다. 그래서 마틸데와 나는 방어 작전 3번에 돌입했다. 식량과 붉은 포도주를 여유 있게 비축하고,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우리 집 대문에 큼직한 자물쇠를 채웠다. 언론의 포위 공격이 장기화될 때를 대비해 조르주 심농의 추리소설도 장만했다. (11장 시는 직업이다)
 
(교보문고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