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7일,한진중공업 김주익 사망 후
 오프닝,2003-10-22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193.000원

한 정치인에게는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할 수 없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막걸리 한 사발에 김치 한보시기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에게는

며칠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는 큰돈입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에게는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서조차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한,

짐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스를 사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일하는 아버지, 고 김주익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이 193.000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193.000원,

인라인스케이트 세 켤레 값입니다.

35m 상공에서 100여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한 일하는 어머니 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휠리스 대목에 목이메인 이 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휠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작년 한진중에서 밀려난 아저씨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30년 일해 온 일터에서 명퇴란 이름으로 강제로 밀려난 아저씨는 술이 한 잔 들어가자 박창수 위원장 이야기를 하며,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는 아저씨가 자꾸 미안하다며 울었습니다. 
50이 넘은 사내가 10년도 더 지난 일로 술잔에 눈물 콧물을 빠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 모두에게 박창수란 이름은 세월의 무게로도 덮을 수 없는 아픔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박창수 하나만으로도 우린 아프고 무겁습니다. 

두번쨉니다. 대한조선공사를 한진중공업이 인수한 이후 여섯 명의 위원장 중 두 명은 구속 이후에 해고되고, 한 명은 고성으로, 율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쫓겨다니고, 두 명은 죽었습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놓으면 다 짤리고 깜빵가고 죽어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뭘 그렇게 죽을죄를 졌습니까? 조양호 회장님, 조남호 부회장님,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이 소름끼치는 살인게임이 앞으로 몇 판이 더 남았습니까? 
LNG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변호사의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노동자의 가련한 처지를 팔아 따낸 권력의 맛이 그렇게 달콤합디까? 조중동 그 찌라시들의 꼬봉노릇이 그렇게 안락하더이까?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했습니까? 21년된 노동자의 기본급 105만원, 세금떼면 80만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늙은 노동자들이 88일을 애원을 해도 청와대, 노동부, 국회의원 어느 놈 하나 코빼기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서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입고, 체감온도 영하 30도 한 겨울에도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그냥 살걸 그랬습니다. 
변소에 우글거리던 구데기들처럼 그냥 그렇게 살 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서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그렇게 살걸 그랬나 봅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조선소 짬밥 20년에 100만원을 받아도,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가, 김주익이가, 그 천금 같은 사람들이,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그 단단한 어깨를, 그 순박한 웃음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OO이 OO이에게, OO이, OO이, OO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착하고 어쩌자고 그렇게 우직했단 말입니까?
애비 잘 만난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 조광호는 태어날 때부터 회장님, 부회장님으로 세자책봉 받는 나라. 이병철 회장님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님으로 재계순위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님이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님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님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님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 태어날 때부터 그 순서는 이미 다 점지되고, 골프나 치고 해외로 수백억씩 빼돌리고, 사교육비로 한 달 수천만원을 써도 재산이 오히려 늘어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한 달 100만원을 벌겠다고 숨도 쉴 수 없고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순이익 수백억이 나고 주식만 가지고 있으면 수십억이 배당금으로 저절로 굴러들어오는데, 2년치 임금 7만5,000원을 올리겠다고 크레인까지 기어 올라간 그 사내가 얼마나 불가사의했겠습니까? 
비자금으로 탈세로 감방을 살고도, 징계는커녕 여전히 회장님인 그들이 보기에 동료들 정리해고 막겠다고 직장에게 맞서다 해고된 노동자가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게 얼마나 가소로웠겠습니까? 
100만원 주던 노동자 짤라내면 70만원만 줘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 백명이 달라들어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또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죽어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도시 대구, 전자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의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들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50이 넘은 농민은 남의 나라에 가서 제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 유언마저 영어로 남겨야 하는 참으로 세계화된 나라. 전 자본주의가 정말 싫습니다. 이제 정말 소름이 끼치게 무섭습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김주익의 죽음의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저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이 피가 거꾸로 솟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고스란히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OO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 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OO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여러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